우리는 내게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부모님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부모님께 감사하고 살아야 합니다. 오늘 본문을 보면, 모세가 이 땅에 태어나게 된 배경이 묘사되고 있는데 ‘레위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었다’고 되어있습니다. 이 부분은 ‘아므람이란 레위자손이 요게벳이란 레위여인에게 장가들었다’로 바꿔 읽어도 무방합니다. 그런데 2절에 보면 요게벳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게 됩니다. 그리고 ‘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다’고 했습니다. 왜 아들을 낳고도 드러내어 기뻐하지도 못하고 숨겨야 했을까요? 그것은 출1장을 읽어보면 배경설명이 잘 되어있습니다. 문제는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나라를 일으킨 공로자임을 기억하지 못하는 새로운 애굽의 왕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. 애굽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번성을 큰 고민거리로 생각하였습니다. 그래서 급기야 내린 결정이 종족말살 정책이었습니다. 왕의 명으로 온 히브리인들에게 명하길 ‘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’고 하였습니다(1:22). 지금 요게벳이 아들을 낳았는데, 애굽 왕의 명령을 지키려면 당장 그 아들을 나일강에 던져야 했습니다. 그러나 그들은 모세를 석 달 동안을 숨겨 키웠다고 했습니다. 저는 요게벳이 아들 모세를 석 달 동안 숨겨 키우는데 그 남편 레위사람 아므람의 역할이 적지 않았음을 짐작합니다. 자녀는 엄마 혼자 키워내는 게 아닙니다. 아버지가 엄마와 동일한 마음으로 자녀양육에 혼신의 힘을 다해야만 합니다. 그런 면에서 요게벳에게는 모세를 석 달 동안 숨겨 키워낼 수 있도록 목숨을 걸고 함께 한 남편 아므람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. 게다가 요게벳은 자기 아들에게서 ‘이스라엘 민족의 소망’을 발견하게 됩니다. ‘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’라고 했는데 그 잘생겼다는 말은 단순히 인물이 잘생긴 것을 말하는 게 아니었습니다. 여기 ‘잘생긴 것’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‘토브’입니다. 이미 이 단어는 창조 때에 하나님께서 일곱 번이나 ‘그 지으신 것을 보고 보시기에 좋았더라’는 말씀을 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. 그렇다면 모세의 부모가 아들을 석 달 숨겨 키울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부모의 본능이기 이전에 그 아이에게서 ‘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’는 즉, 하나님이 뭔가 큰일을 이루실 그릇으로 보내신 아들임을 보는 눈이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. 아들을 낳고 기뻐하지도 못하고 석 달 동안이나 ‘숨죽여 가면서’ 숨겨 키운 그 부모의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. 이건 믿음이 없이 이뤄지기 힘든 일이었습니다. 히11장 믿음 장에 23절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. ‘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’ 모세의 부모가 목숨을 걸고 석 달이나 왕의 명을 거역하면서 그 아이를 키워낸 것이 ‘믿음이 있음으로 가능했던’ 행동이라고 히브리 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. 여러분 참으로 어머니는 위대합니다! 특히 믿음이 있는 어머니, 내 자식을 통해서 일하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견고한 어머니는 참으로 위대한 것입니다! 진짜 어머니는 낳아준 것만으로 그 사명을 다한 게 아닙니다. 그 자녀에게 ‘너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아들’이란다 하면서 키워낸 영적인 어머니가 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. 우리를 낳아준 어머니와 아버지는 정말로 위대합니다.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에게 ‘영적인 부모가 되어준 어머니 아버지는 더욱 더 위대합니다.’ 그리고 ‘우리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희생하고 서원하고 응답받고 지금도 기도하고 계시는 부모님은 위대합니다.’ 그 분들에게 효를 다하고 잘 섬기는 것이 진정으로 우리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인 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.